디지털 전환 시대, 에너지 안보와 원전의 재부상이라는 흐름 속에서 글로벌 지정학적 환경은 급변하고 있으며, 각국은 에너지 공급망 불안정과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동시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에 원자력 발전은 기저 전력원으로서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2025년 1월 17일, 한국전력공사(한전)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와의 지식재산권 분쟁을 종결하고 향후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수주를 위한 핵심 이정표였으나, 계약 세부 내용이 공개되면서 ‘불평등·굴욕 계약’ 논란이 일었습니다. 본 글은 해당 계약의 배경과 주요 조항, 정치·산업적 파장, 그리고 한국 원전 산업의 미래 전략까지 분석합니다.
1. 계약 개요 및 배경

1. 지식재산권 분쟁의 전개와 종결
이번 합의의 핵심 배경은 한국형 원전 APR1400의 기술 기원과 관련된 지식재산권 분쟁입니다. APR1400은 1990년대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현 웨스팅하우스)의 System 80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웨스팅하우스는 한국의 해외 수출 시 자사의 원천기술 사용을 주장하며 법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수주를 앞두고 이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전과 한수원은 소송으로 인해 수출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직면했고 결국 분쟁을 종결하기 위한 협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번 계약은 사실상 웨스팅하우스의 주장을 인정하고 그 대가로 상당한 금전적 의무를 부담하는 구조로 귀결되었습니다.
2. 합작회사(JV) 설립의 배경 및 전략적 의도
합의는 단순히 분쟁 종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원전 시장을 공동 공략하기 위한 합작회사(JV) 설립 논의로 이어졌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설계 역량은 있지만 대규모 건설과 공급망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고, 반면 한국은 APR1400 건설 경험과 공급망 경쟁력이 강점입니다.
이러한 상호 보완성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서 협력한다는 전략이 마련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체코, 중동,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일부 시장에 진출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동시에 웨스팅하우스와의 기술·계약 조건에 장기간 종속되는 구조적 한계를 안게 되었습니다.
2.계약 주요 내용: 논란의 핵심 조항들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의문에는 한국 원전 산업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핵심 조항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조항들은 ‘굴욕적 계약’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1. 과도한 물품·용역 구매 및 로열티 지급 의무
한수원과 한전은 향후 50년간 원전 1기를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에 총 8억 2,500만 달러(약 1조 1,400억 원)를 지급해야 합니다. 이는 물품·용역 구매 약 9,000억 원과 기술 사용료(로열티) 약 2,400억 원으로 구성되며, 물가 상승에 따라 추가 부담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비판론자들은 원전 1기당 1조 원이 넘는 비용이 과도하다고 지적하지만, 옹호론자들은 전체 사업비 대비 비중은 크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2. 시장 진출 제한 및 연료 공급 독점
계약에 따라 한국은 북미, 유럽연합(체코 제외),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시장에 진출할 수 없으며,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남미 등 일부 지역에만 수출이 가능합니다. 또한 체코·사우디 원전에는 100%, 기타 지역에는 50%의 연료를 웨스팅하우스가 독점 공급하도록 되어 있어 장기적인 수익 구조에서 불리합니다.
3. SMR 등 차세대 원전 기술 검증 의무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소형모듈원전(SMR)도 수출하려면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차세대 원전 기술에 대한 독립성까지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SMR 시장은 2040년경 4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한국이 이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경쟁하기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조항들은 한국이 장기간 웨스팅하우스에 종속되는 구조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3. 논란과 비판

1. 야당·시민사회의 강력한 비판
이번 계약의 내용이 공개되자 야당과 시민사회는 즉각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이 합의를 ‘굴욕적 계약’, ’50년 노예계약’으로 규정하며 정부가 기술 주권을 팔아 국부를 유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국정조사, 감사원 감사 청구, 계약 파기 및 재협상을 요구하며 책임자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또한 정치적 목적에 따른 졸속 추진 의혹도 제기했습니다.
2. 정부·업계의 반박과 해명
정부와 원전업계는 이번 계약이 수십조 원 규모 체코 원전 수주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물품·용역 계약은 웨스팅하우스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부분이며, 로열티는 총 사업비의 1.85% 수준으로 감내할 만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작회사는 한국 원전의 미국 시장 진출 교두보를 마련하는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입장입니다. 이처럼 이번 계약을 둘러싸고 ‘굴욕적 합의’ 대 ‘전략적 협상’이라는 상반된 프레임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4. 수익성과 산업적 영향: ‘남는 장사’인가, ‘국부 유출’인가?
1. 수익성 악화 및 적자 가능성
원전 1기당 약 1조 1,40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해야 하는 조건은 한국의 수익성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적자 전환 가능성까지 우려됩니다. 실제로 첫 해외 수출 사례인 UAE 바라카 원전도 누적 적자를 기록하며 재무 건전성에 대한 경고음을 주고 있습니다.
2. 한국 원전산업 자립성 약화 및 의존 구조 고착
계약은 웨스팅하우스 의존 구조를 재확인시켰습니다. 특히 SMR 수출 시 기술 검증 의무는 미래 기술 주권까지 제약해 자립 전략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APR1400 역시 웨스팅하우스 원천 기술 기반임이 확인되면서 독자 기술이라는 자부심에도 균열이 생겼습니다.
3. 글로벌 경쟁력 약화 우려
시장 진출 제한 조항은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크게 제약합니다. 북미·유럽 주요 시장에서 배제되면서 프랑스 EDF, 러시아 로사톰 등과 동등하게 경쟁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하는 비용은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려 해외 원전 수주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번 계약은 단기 성과를 얻는 대신 장기적 수익성과 자립성, 경쟁력을 희생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5. 미래 전망 및 과제: 50년 계약이 던지는 숙제

1. 50년 장기 계약의 구조적 영향과 재협상 가능성
향후 50년간 적용될 이번 계약은 한국 원전 산업의 향방을 결정하는 구조적 틀이 될 것입니다. 이 계약이 한국 원전 수출의 지속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경우, 이는 장기적인 재무적·산업적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미국 내 원전 확장 정책이 본격화될 경우 협력 관계 재설정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2. 한국 원전 기술 자립 전략의 재정비
이번 계약이 던진 가장 큰 과제는 한국 원전 기술의 완전한 자립 전략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웨스팅하우스 의존에서 벗어난 차세대 원전 노형 개발, 정부 차원의 R&D 투자 확대, 기술 주권 확보가 핵심 과제로 제기됩니다.
3. 규제·정치적 리스크 대응 방안
해외 원전 프로젝트는 발주국의 규제와 정치적 리스크에 취약합니다. 따라서 한국은 원자력 규제기관의 독립성 확보, 국제 협력 강화, 계약 시 보호 조항 마련 등 제도적 장치를 보강해야 합니다.
4. 글로벌 원전 수출의 다변화 및 균형 외교
특정 파트너와 시장 의존도를 줄이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으로 진출하는 다변화 전략이 필요합니다. 또한 프랑스, 러시아 등과 경쟁을 넘어 협력적 제휴를 모색하고, 중소기업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7. 결론 :
한수원·한전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계약은 단순한 상업적 합의를 넘어 한국 원전 산업의 기술 주권과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번 계약은 장기적인 기술 자립을 희생하면서 단기적인 수출 성과를 얻었다는 비판과, 불가피한 현실 속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공존합니다. 결국 미래 원전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키워드는 신뢰와 자립입니다.
한국은 국제사회와 이해관계자들에게 투명성과 신뢰를 확보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기술 자립을 위한 투자와 전략적 노력을 병행해야만 진정한 원전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